동궁 동쪽에 동구릉이 있다면 서쪽에 서릉과 서삼릉이 있다. 서릉(西陵)이라는 이름은 서쪽에 다섯 개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릉에 처음 조성되는 무덤은 세조의 장남 의경왕자가 묻힌 경릉이다. 이후 세조의 아버지인 세조는 이 무덤을 제7대 덕종(德宗)으로 선정하였다. 조선의 왕릉은 제각기 독특한 특징이 있지만 서릉에는 유난히 흥미로운 왕릉이 많다. 경릉은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왕과 왕비의 위치를 바꾼 무덤이다.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왕이 오른쪽에, 왕비가 왼쪽에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릉왕릉은 왼쪽에, 소혜왕후는 왼쪽에, 덕종왕후는 오른쪽에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경릉에는 왕의 무덤보다 왕비의 무덤이 더 높게 세워진 곳이 한 곳밖에 없다. 덕종은 세상을 떠날 때 왕세자..
선왕릉의 상징 동구릉조선왕릉의 대표적인 장소는 서울 동쪽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이다. 이곳이 동구릉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곳인지 짐작할 수 있다.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무덤을 뜻한다. 동구릉은 1408년(태종 8)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면서 처음 건립되었다. 태조가 묻힌 건원릉에는 왕과 왕비가 많이 묻혔고, 동구릉에는 17번째 큰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조선왕릉 중 가장 큰 무덤군이다. 태조 이성계가 묻혔을 때 동구릉이 아니라 건원릉으로 불렸다. 이후 문종, 선조, 장렬왕후, 현종이 무덤에 묻혔고, 단의왕후와 영조의 능을 동칠릉이라 불렀다. 헌종과 문조(효명왕의 호칭)가 묻힌 후 19세기 중엽부터 동구릉(東口陵) 좋은 땅과 위치를 연구하는 풍수지리학자들은 태조가 안장된 건원릉이 세계 최고라고..
조선왕릉은 519년간 지속된 한나라 왕과 왕비의 무덤이 완벽하게 보존된 곳이다. 왕릉은 조상과 그 업적을 기리고 존중하여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조상의 영혼을 보호하고 무덤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데 헌신하였다. 자연을 중시하는 풍수이론의 영향으로 자연 친화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519년 동안 지속된 한나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잘 보존된 유적이다. 조선왕조에는 119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 중 42기는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왕릉이다. 왕릉 42개 중 40개는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옛 고려의 수도 개성의 두 번째 비행기는 북쪽에 위치해 있어 함께 등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조선왕릉은 자연을 중시하는 풍수이론의 영향을 받아 자연 친화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삼은 조선은 무엇보다 조상 숭배를 중시했다. 그래서 왕릉은 왕이 잠들기 위해 매우 중요했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당대 최고의 지류(풍수리학자)가 동원되어 왕릉의 위치를 정하였다. 살아 있을 때 미리 매장지를 정한 왕도 있었다. 왕의 매장지를 결정하는 데는 풍수가 최우선이었다. 풍수지리에서는 물, 산, 땅, 바람과 같은 자연현상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여겨졌다. 왕이 머물렀던 궁전만큼이나 죽은 왕이 묻힐 곳을 정할 때 풍수지리적인 면에서 매우 좋은 장소를 택했다. 일단 왕릉의 위치가 결정되자 본격적인 왕릉 건설이 시작되었다. 무덤은 왕의 업적과 미래의 왕이 누구냐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었다. 왕릉 입구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인 재실이..
519년 동안 조선을 이끌었던 왕실의 무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곳은 왕릉이다. 황태자 부부가 묻힌 곳을 원이라고 하는데, 13개의 깃발이 있다. 또한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족 등이 묻힌 곳을 '묘'라고 하는데, 모두 64기의 무덤이 있다. 왕들이 모두 왕릉에 묻힌 것은 아니었다. 종묘에서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는 왕릉에 들어갈 수 없었다. 10대 왕 연산군과 15대 왕 광해군은 종묘에 사당이 없어 왕릉이 아닌 무덤에 묻힌다. 조선시대 왕릉은 대부분 수도였던 한양 외곽에 있다. 왕릉을 80리(오늘 100리, 당시 10리) 안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지, 오늘날 4km가 아니라 5.2km였다. 그리고 궁에서 나오는 왕실 행렬은 왕이..
9월 23일 kangjoomo 티스토리 블로그 시작해요.